- 제 11 강 -
*** 깨달음으로 가는 새로운 방편 (1-2) ***
삼매 속에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최근에 발달된 뇌 과학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먼 옛날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과거의 수행방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은, 과거의 전통적인 수행방편과 현재 발달된 과학을 서로 연기(관계성)시켜 지금에 가장 알맞은 새로운 수행방편으로 제시 되어야 한다는 연기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모든 것은 바뀐다는 무상無常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강의에서 새로운 수행방편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지금의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여 공부한 체험적인 것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견성(깨달음, 돈오頓悟)을 한 수행자들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새벽에 닭 우는 소리에 문득 깨달은 경우, 마당 쓸다가 대나무에 기와 조각 부딪히는 딱! 하는 소리에 문득 깨닫는 경우, 시냇물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문득 깨닫는 등 여러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수행자는 나는 어째서 이런 경계에 부딪혀도 깨닫지 못하는가? 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깨닫는(견성) 순간 우연히 닭이 울었던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남과 자기의 공부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공부는 스스로 사무치고 스스로 깨닫는 공부이기 때문에 게으름 없이 열심히 묵묵히 부단히 어떠한 유혹이나 어려운 일에도 굴함이 없이 홀로 정진精進(다른 마음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감)하라는 의미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직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그리고 향상일로向上一路하라”는 말과 그 의미가 같습니다. 즉 `정진바라밀’을 뜻합니다.
깨달음은 “깨달아야지!”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또 다른 번뇌 망상이 되어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와 같이 무엇을 할 때 “그렇게 해야지!”라는 마음을 의식적으로 일으키면 이것이 스트레스가 되어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만 최선을 다 하다 보면(무심無心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구하려고 하는 그 생각(내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래야만 구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과 다른 것입니다.
집중한다는 것은 한 가지에 몰입해서 의심하는 것(이 뭣꼬, 왜 그럴까?)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 하나의 의심하는 대상 외에 다른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수행방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우리나라는 중국의 참선수행參禪修行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중에서도 화두話頭를 참구參究(의심해 들어가는 것)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의심하는 대상을 ‘화두話頭’라 하며 화두의 본래 의미는 ‘격외格外의 말’이라 해서 어떠한 지식이나 개념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언어 문자를 떠나있다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많이 사용하던 화두話頭(공안公案)는 1701개가 있었습니다. 화두를 의심할 때는 내 생각을 조금도 개입시켜서는 안 되며 오직 ‘어째서’ ‘이뭣꼬’만을 간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화두는 공부가 무르익어 발심이 강해졌을 때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화두는 본래 깨달음을 이룬 스승(눈 밝은 스승; 명안종사明眼宗師)이 제자의 공부가 무르익었음을 알고 제자의 근기에 맞는 ‘격외의 언어’로 깨달음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이 말을 듣고 다행히 화닥닥 깨치면(언하대오言下大悟) 참구(의심)할 필요가 없으나, 대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의심(참구參究)해 들어가는 것(간화선)입니다. 따라서 공부가 무르익지 않은 수행자에게 화두를 주는 일은 견성을 하는데 있어 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전자는 수행자의 공부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믿음이 강해져 수행자와 화두의 인연이 매우 깊어서 강력한 의심이 생기고, 후자는 그 반대 이므로 수행자와 화두의 인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날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공부가 짧은 사람이 화두 하나 받아서 수행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 방법은 오늘날 일반적인 경우에는 불가능해서 대중성이 없습니다.
화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무자無字'화두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경전의 가르침에도 스승의 가르침에도 “모든 것(중생)에는 본래 가지고 있는 깨달을 수 있는 성질(부처가 될 성질) 즉, 불성佛性이 있다.”라고 했기 때문에 이 말을 굳게 믿고 있던 수행자가, 어느 날 스승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없다(무無)!”고 스승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는 숨이 탁! 하고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없다고 하는 스승의 말을 믿자니 있다고 하는 경전(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되고, 경전의 가르침을 믿자니 지금 없다고 하는 스승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승이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며, “없다(무無)”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알 길이 없고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때의 `무無’는 있다(유有) 없다(무無)의 무無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말을 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불러일으켜 그 의심에 몰입되게 함으로써 화두삼매에 들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화두는 마치 군대에서 적군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는 야간에 아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쓰는 암구호와 같은 것이어서, “진달래”라고 할 때 “종달새”라고 하면, 아군임을 알아차리는 것일 뿐, 진달래나 종달새라는 꽃이나 새의 개념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달래”라고 할 때 “종달새”라는 답을 모르면 어쩔 수 없이 그 까닭을 참구해 들어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간화선 수행 방편도 화두를 통해서 삼매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 날에는 맞지 않습니다.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걸림없는 자유인~ (0) | 2014.02.04 |
|---|---|
| [스크랩] - 제 14 강 - * 본질(체體)과 현상(상相, 용用)의 원리 (2-2) * (0) | 2014.02.04 |
| [스크랩] - 제 11 강 - * 깨달음으로 가는 새로운 방편 (1-1) * (0) | 2013.12.03 |
| [스크랩] 11/27[水]...3색 (0) | 2013.11.29 |
| [스크랩] - 제 10 강 - *** 마음의 구조와 작용 (2-3) *** (0) | 2013.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