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 강 -
*** 공, 인연, 연기, 무상, 무아의 원리 (3-2)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우리는 연기의 원리에서 일체 삼라만상(제법諸法)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므로 실로 있다든지 항상 한다든지 할 아무런 것도 없고 모든 현상계 제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相依性관계에 있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해서 제법(모든 것)이 ‘무無’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연으로 결합된 모든 것은 각기 그 인연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잡아함경 권10’에 보면 이런 의문을 제시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일체 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의문을 일으켰던 제자에게 스승은 다음과 같은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두 극단에 의해서 미혹迷惑(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림)한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세간(세상)을 참으로 바로 관찰하면, 세간은 없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세간의 멸함을 여실히(실답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세간은 있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如來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말한다.”
세간世間(세계 또는 일체를 의미함)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그저 없다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연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실재성實在性이 없는 것(가립된 존재)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妄念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滅(깨달음)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입니다.
중도의 원리에서 독창적으로 주장하는 무아설無我說의 높은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망아忘我, 가아假我)’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무아설은 유有와 무無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곧 12연기설에 입각한 것입니다.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입니다. 그와 같이 단斷(없다)과 상常(있다), 일一(같다, 하나다)과 이異(다르다), 자작自作과 타작他作등 두 극단도 초월해 있습니다.
“자작과 타작의 두 극단을 초월해 있는 것이 중도다.”라는 말은, 중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아自我(확정짓는 것, 고정관념, 내 세우는 것)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사상’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위(업業)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행위를 하게 되면 반드시 그 행위에 대한 결과(보報, 과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때 행위를 하는 자와 그 행위의 결과를 받는 자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업자득’ `인과응보’ ‘자작자수’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자작은 `자작自作 자각自覺’으로서 행위(업業)를 한 사람이 행위의 결과(보報, 과果)를 받는다는 뜻이고, 타작은 `타작他作 타각他覺’으로서 행위를 한 사람이 행위의 결과를 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업을 짓는 사람과 보를 받는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여 자작을 주장하는 것은 상견常見이며, 업을 짓는 사람과 보를 받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간주하여 타작을 주장하는 것은 단견斷見이라 하는데 깨달음의 세계(중도)에서는 두 경우 모두 부정합니다.
두 경우 모두 업이나 업보에 대해 그것을 행하고 받는 자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업業과 보報(과果)는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인과응보는 존재하지만 업의 주체와 보의 주체가 따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업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업과 보의 인과응보는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바로 12연기법입니다. 무명(내 생각, 고정관념, 아상, 어리석음)이 있으면 업이 만들어지고 그 업에 의해 보가 생기고, 그 보는 새로운 업이 되고, 그 새로운 업은 또 다른 보를 만드는 것(유전문; 연기의 순관順觀)입니다. 따라서 무명이 없어지고 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면 모든 업과 보가 다 소멸되는 것(환멸문; 연기의 역관逆觀)이 12연기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존속되는지 아니면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지 라는 물음에 대해 존속한다고 하면 상견이 되고 없어진다고 하거나 아니면 알 수 없다고 한다면 단견이 되기 때문에 무어라고 말해도 중도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침묵(무기無記)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질문 자체가 무아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물음에 이미 자아(자기 동일적 자아)의 관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유는 우리의 개념에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중도의 원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한 횃불에서 다른 횃불로 불을 붙인다고 할 경우 그 불이 그대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물음은 깨달음의 세계에서 윤회를 말한다고 해서 ‘자기 동일적 자아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문입니다. 한 횃불에서 다른 횃불로 옮겨간 횃불이 되었든, 한 횃불에서 계속 타고 있는 횃불이 되었든 불의 성품(체)은 같으나 모양(상)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불의 모양은 순간순간 다르듯이 자기 동일적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에 생멸할 뿐이라는 무상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연기의 자아(가립된 존재)’이며, 윤회의 주체인 '업의 자아’를 말하는 오온설五蘊說(오음五陰說)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자아에 관한 상견과 단견을 모두 부정하면서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말합니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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