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 제 18 강 - * 공, 인연, 연기, 무상, 무아의 원리 (3-1) *

안계석 2014. 3. 11. 18:01

                              - 제 18 강 -

              *** 공, 인연, 연기, 무상, 무아의 원리 (3-1) ***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 세계>

 

무상無常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항상(영원)하지 않다.’ 즉 고정되어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상호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연기설緣起說은 무상관無常觀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입니다.

무상은 그 어느 것도 연속적인 두 순간에 똑같은 것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이 어느 한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그 다음 순간에는 뭔가 다른 것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나 우리가 볼 수 없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고 하는 말은 모순입니다. 까닭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고 단정 지어 말했기 때문에 이 말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무상의 개념은 비교적 이해하기는 쉬우나 무상을 명확하게 보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상을 보면 공을 본다.’는 말이 있으며, 무상에서 모든 원리가 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말인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여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상은 비관적 세계관이 아니라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게 함으로써 욕심으로부터 해방되게 합니다. 이것은 실상實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가 바뀌면서 이어져 내려가고 있음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무상을 보려면 반드시 시간에 대한 개념을 무한대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긴 시간을 찰나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상한 존재들은 그저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연기적緣起的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존재의 성질을 ‘공하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하다는 것은 연기적인 존재의 보편적인 성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서로 연기되어 일어나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성질을 공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저절로 공해져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어 ‘무아無我’라 합니다. 이러한 원리로 볼 때, 무아는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해체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즉, 자성이 없다(무자성無自性)는 뜻이 되고, 존재하기는 하나 ‘내가 아닌 것(비아非我)으로 구성되었다(오온; 색, 수, 상, 행, 식)’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공사상으로 발전하며, 무아사상은 인간의 문제(인무아人無我; 아공我空) 뿐 아니라 모든 사물(法법)도 이와 같으므로 ‘법무아法無我(법공法空; 모든 것은 공하다)’라는 말을 낳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몸 안에 나를 움직이고 조절하는 개체의 자아自我가 있다면 부모가 없어도 태어날 수 있어야 하고, 죽지도 않아야 하며 병에도 걸리지 말아야 하고, 설혹 병에 걸리더라도 “병아, 나아라!”하고 명령하면 병이 나아야 합니다.

 

무상無常은 변화를 의미함으로 다양성을 뜻하는 말이며, 다양하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커다란 축복은 없습니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똑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루하고 재미없는 삭막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우주를 구성하는 별들도 생겨나고 흩어지며, 우리들의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생주이멸生住異滅).

무상과 연기의 원리로 볼 때 만상은 인연(조건) 따라 모이고 나타나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되고 흩어지면 없어져 볼 수 없게 됩니다.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주고받는 상호의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인간의 몸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무생명체라고 하는 것들(돌, 금속 등)의 성분도 우리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절대적인 성분이 되므로 사실상의 무 생명체는 없습니다. 다만 생명체의 밖에 있을 뿐입니다.

 

공, 인연, 연기, 무상, 무아를 하나로 만들면 ‘모든 것은 현재 서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으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같은 것(다르지 않다)이다.’ 즉, ‘모든 것은 모양(상)과 작용(용)은 다르나 본질(체)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너(객관)와 나(주관)라는 분별되고 차별된 일체의 개념을 초월한 것이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는 원리로 발전하며, 중도란? 서로 다른 양극단을 벗어나(초월) 서로 다른 것들이 화합하여 원융무애圓融无涯(만물과 융화하고 걸림이 없음) 한 것을 의미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경우, 괴로움도 즐거움도 동시에 벗어나(양극단을 벗어남) 어디에도 끌려 다니지 않고 늘 마음이 안락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묘락妙樂(묘한 즐거움)’이 중도의 즐거움입니다.

 

자기 자신을 영원한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무언가 영원불멸하는 실체가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거나(상견常見), 반대로 ‘신이고 무엇이고 다 필요 없다.’라고 생각하여 영원한 자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죽으면 다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현실적인 삶의 연속성(윤회)까지도 부정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단견斷見)과 같은 이러한 두 가지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상중도斷常中道’라 합니다.

결국, ‘중도’는 존재가 스스로의 성품(자성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견해(상견)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단견) 두 견해를 다 떠나는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기를, `나(아我)’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세 번이나 물었으나 스승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제자는 대답이 없기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뒤 다른 제자에게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일 ‘유아(有我, 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는 유아의 사견邪見만을 더할 것이요, 만일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의혹에 의혹만을 더해 줄 뿐이다. 만일 ‘내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견常見이요, `내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견斷見이다. 나는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 서서 법을 설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잡아함경 권10>

 

 

                                                                 - 다음에 계속 -

                                             출처 http://blog.naver.com/yhaesan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yhaesan(양철곤;慧山) 원글보기
메모 :